문학평론가 임우기 선생의 '달빛 등반'에 대한 짧은 시평이 페이스북에 있어 그대로 옮겨와 올립니다.
김기섭 시인의 첫 시집 <<달빛 등반>> 출간.
詩의 主語가 意味를 넘어 餘白이 된 시가 있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시가 아니라, 의미를 소멸시키기 위해 가까스로 의미를 표시하는 시. 깊은 고통의 세월을 거치지 않고는 낳기 힘든 시. 죽음 속의 삶은 삶의 의미를 넘어 삶의 여백을 낳는다. 虛空과 餘白이 ‘의미의 의미’를 낳는다. 山岳은 침묵 여백을 가르친다. 김기섭의 시의 허공엔 산과 숲과 바위의 그윽한 향이 가득하다.
전문 산악인들에겐 잘 알려진 암벽등반가 김기섭 시인의 첫 시집이 어제 출간되었다. 산악인 시인으로서 그의 詩는 山岳이 낳고 키웠다. 시집 발문을 쓴 김형수 시인(신동엽문학관장)은 “山頂을 걷는 자의 깊고 푸른 정신”이라고 썼다. 실로 시집엔 '산악의 정신과 산악의 은은한 향기'가 죽음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깊고 깊고 푸르고 푸르다.
김기섭 시인은 북한산 백운대 남서벽에 약 330m에 이르는 암벽길을 완성하고 장편서사시 <<금강>>을 쓴 대시인 신동엽 선생을 기리기 위해 ‘시인 신동엽길’이라 이름붙인 장본인이다.
이 시집은 경애하는 김형수 시인, 장편서사시 <<붉은산 검은피>>의 시인 오봉옥 교수 등 맑고 진실한 시혼들의 기획으로 출간되었다.
김기섭 시인의 시집 <<달빛 등반>> 출간을 자축하는 새벽녘이다.
머리맡에 둔 새 시집에서 문득 손에 잡힌, 두 편의 시를 아래에 올린다. 아직 먼동이 트기 전이다.
<지도에 없는 길 위에서>
/김기섭
섬진강 구담을 지나면서부터
오만분의 일 지도에서 길 표시가 사라지고 없다
낮은 데로 흐르는 물 따라
햇살 밟는 소리만 사각사각
정적에 묻힐 뿐이다
숨가쁘게 파란 하늘
누구에세 쫓길 필요 없고
연둣빛 신록이 펼쳐진 길에서
맞이하는 봄날의 자유
사는 즐거움이란 별것 아니다
햇빛 고운 바람과
때깔 고운 이파리들과 내통하는 즐거움이다
송홧 가루 날린다
꿩 한 마리 날아간 산 모퉁이
몇 굽이 돌고 돌아
떡갈나무 그림자 드리운 풀밭에 누워
잠시 미뤄둔 빠른 일상
돌아보니 지나온 날들은
늘 허기졌고
길 위에서 나는
흙먼지였다
<배롱나무>
/김기섭
발톱이 빠져버린 사랑이 있었네
한여름이 다 가도록
별들은 노래 부르지 않았고
강물은 흐르길 거부했네
배롱나무 아래 애인 있었네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비가 내려
생을 접기라도 하듯
꽃잎 떨어져
빗소리에 스며든 여자 있었네
밤이 오고
내가 울고 있었네
머뭇거릴 틈도 없이 별똥별이 떨어졌네
서툴게
아주아주 서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