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걷는 옛길
어젯밤 안치운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약간은 여린 듯,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 있는 목소리. 선생은 어머니의 상 때문에 잠시 귀국했다. 상실감이 컸으리라. 선생은 상처를 바닷바람에 씻기 위해 김영재님이 있는 부안군 위도에 갔다. 거기서 술 한 잔 하다가 문득 내가 생각나서 전화했나 보다.
전화를 끊고 선생에 대한 오래 된 기억들을 되살려냈다. 선생과 나는 배강달이란 후배와 함께 산행을 했고 '한 편의 詩를 위한 길'을 올랐다. 그리고 나는 선생이 인도하는 데로 그의 옛길을 걸었다. 나는 그에게서 곧게 난 길보다 산모퉁이가 있는 구부정한 길의, 투박한 아름다움을 배웠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나는 옛길 하나. 2002년 태풍 루사가 강원도 삼척을 휩쓸고 간 뒤 응봉산 덕풍계곡으로 이어진, 다소 쇠락한 길을 찾았다. 길은 보름달에 휩싸여 있었고 간간이 끊겨진 다리의 파편을 넘어 깊은 골짜기로 접어들 즈음, 배강달이 노래를 불렀다. '봄날은 간다', 그의 애절한 소리는 어둠에 잠겨 들었고.
안 선생의 길은 근현대사에 있어 소외된 자들이 찾는 곳이었다. 그의 노정에는 그늘진 사람들의 표정이 서려 있었고, 그의 길섶에는 조금은 느긋한 매미의 울음소리, 간혹 산들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이면 별들이 내려앉았다.
나는 안 선생이 집필한 연극 관련 서적들을 읽지 못했다. 나는 그런 책보다 '옛길'이나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에 나오는 그이 글이 좋다. 글은 그가 현대사를 목도한 것처럼 아픔이 배어 있었다. 폐교처럼 무너진 잔재 위에서 그의 글은 빛났고 옛길처럼 소박하면서도 사뭇 사색적인 글은 그의 품성에 기인하리라.
그는 상처를 다스리고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다. 벚꽃 분분이 휘날리는 산모퉁이를 돌아, 별들이 알프스 산맥 넘어 잠자러 가는 옛길을 따라 산골짜기로 갈 것이다. 그가 가기 전 한 번은 짬을 내어 소주 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