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악령의 시대를 묵상함
어제 머리 수 보태려고 광화문 촛불 집회에 갓ㅅ다. 대한문 부근을 지날 무렵, 둥굴교 교주가 나눠 주는 악귀 퇴치용 부적을 받으면서 문득 고정희 시인의 '다시 악령의 시대를 묵상함'이라는 시 한 편이 생각낫ㅅ다.
악마나 악귀 그리고 악령은 사후에 잇ㅅ는 단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사 현상들 가운데 증오의 대상을 치환시켯ㅅ을 ㄷ다름이다. 고정희 시인의 시를 돌이켜 생각하니, 우리가 살고 잇ㅅ는 시대가 바로 악령의 시대 임에 틀림없고, 그에 대한 우리 선량한 민초들의 도도한 저항이 190만 촛불로 표출한 것이다.
그럼, 우리 시대의 악령은 누구인가... 국정교과서악령,정경유착악령, 설악산케이블카건설악령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 모두 암적인 대상이다. 이것들은 100만 촛불로, 200만 촛불로, 아니 1000만 촛불로 다 태워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ㄷ도 악령들이 규합하여 우리의 목에 칼을 겨눌 것이다.
밥과 자본주의
다시 악령의 시대를 묵상함
고정희
고백하건대, 내 오랫동안 찾아 헤맨 그대가 있었습니다
총명하며 눈이 맑으며 사려 깊은 그대 찾아 헤맸습니다
내가 지쳤을 때 비파소리로 나를 깨우며
내가 곤궁했을 때 부드러운 품으로 나를 감싸고
내가 망가지고 망가졌을 때 서늘한 골짜기로 나를 인도하는 그대 찾아
낮과 밤 표표히 유랑했습니다
때로 산등성이를 날아가는 새의 하늘에서
나는 그대 모습을 보았습니다
때로 저녁 숲에 내려앉는 달빛 속에서
나는 그대 음성 들었습니다
아아 그리고 때때로
새벽빛이 일어서는 아쓱한 강안에서
나는 그대 발자국 소릴 그리워했습니다
그런 그대 찾아 멀고먼 땅에 갈망의 닻을 내리고서
나는 오늘 느닷없이 악령을 만났습니다
찻집에서 너로구나…… 마주앉은 그 순간,
총명하며 눈이 맑으며 사려 깊은 그대가 다가오는 그 순간,
그대 속에 은거하는 악령을 보았습니다
악령은 시궁창 모습으로 살지 않습니다
악령은 마귀 얼굴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악령은 누추하거나 냄새나는 손으로 악수하지 않습니다
악령은 무식하거나 가난하지 않으며
악령은 패배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악령은 성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를 범하지 않습니다
악령은 아름답습니다 악령은
고상하며 인자스럽고 악령은 언제나
매혹적이며 우아하고 악령은 언제나
오래 기다리고 유혹적이며 악령은 언제나
당당하고 너그러운 승리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일단 제압한 뒤
우리의 밥그릇에 들어앉습니다
악령은 또 하나의 신념입니다
악령의 이념은 정복자의 승리입니다
악령의 신호는 분열이며 분단입니다
악령의 생존권은 전쟁이며 학살입니다
악령이 깃든 곳에 거짓 행복 거짓 평화 거짓 통일 있습니다
악령의 완성은 죽음에 이르는 강시 천국입니다
그러나 악령은 악에 의한 악을 위한 악의 승리에 모순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직 정복자의 승리에 축전을 보내고
그러므로 내가 아직 분열 분단 속에 살며
그러므로 내가 아직 학살의 역사 속에 있다면
내 시대는 바로 악령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그대 향한 내 꿈을 불살라야 합니다
그대를 악령과 바꾸지 않기 위해서
이제 내가 지쳤을 때 비파소리로 나를 깨우는 그대는 없습니다
내가 곤궁했을 때 부드러운 품으로 나를 감싸는 그대는 없습니다
내가 망가지고 망가졌을 때 나를 서늘한 정신의 골짜기로 인도하는 그대는 없습니다
이것이 악령의 시대의 대가입니다
고정희 시인의 시집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