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바람에 기대어 서서
김기섭
바람이 되고 싶다.
잠들지 않는 떠돌이 바람이 되어
햇살이 한 잎, 두 잎 음악처럼 떨어지는 인수봉 꼭대기에 앉아
벗들과 함께 올랐던 동양길 의대길 이름들을
하나, 둘 추억하다 크랙에 손을 넣어본다.
크랙은 아직 어둠처럼 차갑고
슬랩에 볼을 대면 화강암에서 묻어나는 바위의 잔향殘香
나는 이 향기 때문에 삼각산과 도봉산,
설악의 숨어있는 벽들을 찾아 골골이 쏘다녔다.
바람은 나의 운명
떠날 채비만 하면 어디든 날아가
꽃이 되고 詩가 되고 강이 된다.
그러다가 청춘의 숲처럼 떠오르는 영월 東江의
번뜩이는 시퍼런 물비늘 위에 누워 강으로, 강으로 흘러들어
저녁나절
일몰이 꽃물처럼 붉게 번지는 서해에 닿으면
내 몸 안에서 한 점 돋아나는 격렬비열도
새들이 떠난 섬으로, 별들이 배꽃 마냥 마구 휘날리는 밤
그 별들이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며 비발디의 봄을 연주하는 동안,
별빛에 기대어 신대철 시인의 ‘무인도를 위하여’를 읽다가
이른 아침, 눈 부비고 지상으로 내려와 아지랑이 나풀대는 남도의 들녘에 앉아
청춘의 한 시절
춘궁기에 눈물처럼 만난 한 여자의 이름을 불러본다.
가버린 목소리의 뒷모습, 떠난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바람이고 싶다.
내 영혼은 한없이 가볍고, 자유로워
강원도 정선의 산골짜기로 날아가
춘설이 거문고 산조처럼 분분히 흩날리는 이른 봄의 저녁
고요가 깃든 집, 수정헌의 싸리문에 기대어
가리왕산 산자락이 멈춘, 산그늘을 한없이 응시하다가
그 집 여자가 사랑했던 사내
죽어서 결국 알피니즘이 되어버린 김형일, 혁명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생각한다.
마침 여자는
가수 안치환의 그늘지고도 낮은 음계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노래가 끝날 무렵 서늘하게 흘러내리는 눈물,
눈물방울들은 밤이 되면서 별들의 강가에 닿았고
나는 어둠의 언저리에 걸터앉아
그저 소리 없이 흘러가는 강물의,
춘설처럼 덧없이 스러지는 별의 찰나와 인생의 소멸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지상의 아주 낮은 지평선에선
한낱 꿈이라 여겼던 모진 목숨들이 무거운 겨울 외투를 털어내며
지상의 그리운 것들을 향하여 외출을 서두르고 있다.
춘삼월,
3월이 가기 전에 사랑을 다시 해야겠다.
*박기동 시, 안성현 작곡의 부용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