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 선생의 ‘달빛 등반’ 서평
김미옥 선생의 ‘달빛 등반’ 서평
- 우리 사이에 山이 있었네
*
암벽 장비를 꺼내본다
자일에 걸려 있는 뭉게구름
길은 어느덧 고비사막으로 나있고
자고나면 신기루같이 사라지는 바윗길
손금에서 손금으로 잇닿은 운명선을 떠돌다가
지문이 이지러지도록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것이 숙명이라면
나락으로 추락한들 회피하지 않으리
선택할 여지없이
쏘가리 은신처로 길은 나있고
가파른 여울목을 차고 올라
살 떨리는 고도감을 넘어
그토록 기다리던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 위에 서 있으리
-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 부분, 시집 『달빛 등반』에서
“나락으로 추락한들 회피하지 않으리/선택할 여지없이”
시인은 2005년 홍천강길을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 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듬해 인수봉 암벽에서 추락했다.
그는 지금 휠체어에 앉아있다.
김기섭의 시집 『달빛 등반』이 내게로 왔다.
그는 암벽 등반가이자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루트파인더였다.
그가 지은 산길의 이름을 기억한다.
설악산 노적봉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북한산 백운대 <시인 신동엽길>, 설악산 토왕골 <별을 따는 소년들>, 도봉산 자운봉 <배추흰나비의 추억> 등 17개의 산길 이름을 지었다.
*
행간 속에 숨겨둔 나의 몽상적인 공화국에도 밤이 오고 있었지. 바위틈에선 솜다리가 피어나고 산양들은 절벽 끝에 걸터앉아 깊게 파인 산주름을 보았지. 이슥한 밤을 틈타 반구대 암각화에서 깨어난 소년들이 혹등고래를 타고 검은 파도를 넘어 토왕골을 들어설 적에도 은하수는 여전히 출렁거렸고
소년들은 선녀봉으로 짧은 궤적을 그리며 사라지는 유성우를 황홀히 바라보다가 거문고자리에서 생성과 소멸에 대해 연주했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밤, 새벽이면 사라질 노래는 북방 한계선을 넘어 개마고원을 지나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에 닿았지만, 사랑이 말라버린 벌판에는 스산한 바람 소리만 가득 찼지.
- 「별을 따는 소년들」 부분, 시집 『달빛 등반』
‘별을 따는 소년들’은 국문학도인 그가 붙인 설악산 토왕골의 등반길이다.
암릉의 아슬아슬한 능선을 따라 오르내려 절경의 감동을 주지만 사고 위험이 많이 따른다.
별이 쏟아지는 밤, 절벽에 앉은 시인은 혹등고래를 탄 암각화의 소년이 되어 생성과 소멸, 기쁨과 슬픔, 끝내는 바람으로 사라질 노래에 생의 허무를 실었다.
시를 읽다가 내 눈에도 별이 흘렀다.
*
그때 내가 아는 한 여자는 원추리 이파리들이 싱그러운 강 언덕에서 기타를 튕기며 <솔베이지의 노래>를 연주했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노래는 서강 맑은 물 따라 떠나갔네. 강물은 푸르고 푸르러서 아무 소리 없이 사라졌지만 강바닥 물고기들은 그녀의 기타 울림에 귀 기울이고 있었네.
길고 긴 기다림을 참을 수 없어 기타 줄을 잡았네. 잠깐 불협화음이 나긴 했지만 그 소린 풀잎들의 사소한 흔들림 같아서 잦아들었고 촉촉한 입맞춤이 혀를 감돌 때 서로의 비밀을 알아버렸네. 그건 신이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인간들의 자연스런 몸짓이어서 지나가던 강물마저 잠시 멈칫, 주저하며 멈추었네.
사람들이 하는 소리란 때론 소란스런 것이어서, 그 몸짓에 풀잎들의 키가 소소히 클 터인데 강물은 즐 그랬다는 듯 아무 표정 없이 한강으로 흘러들었고 여자와 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봄빛을 맞으며 강가로 나아가 강물의 흔적들을 구석구석 새기며, 가는 봄날에 대하여 복사꽃처럼 서러워했네.
그 후로 몇 년 뒤, 5월의 처녀들은 서강 둔치에 앉아, 그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을 향해 서글픈 현을 튕기고 있었지만, 과거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강의 물 빛깔과 깊이는 알 수 없었다네. 다만 강물과 강물 사이로 달이 뜨고 별이 지는 동안, 사랑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네.
- 「봄날은 간다」 전문, 시집 『달빛 등반』
영월 서강의 강변 암릉 등반길의 이름은 <봄날은 간다>이다.
여자는 알고 있었을까?
시인의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서울살이 외로워 강원도 소년 혼자 오른 첫길이 도봉산이었는지.
홀로 텐트 속에 잠든 16살 소년에게 산사람들이 손을 내밀었을 때처럼
시집을 읽던 나는 문득 의자에 앉아있는 시인의 손을 잡고 싶다.
*
발톱이 빠져버린 사랑이 있었네
한여름이 다 가도록
별들은 노래 부르지 않았고
강물은 흐르길 거부했네.
배롱나무 아래 애인 있었네.
한치 앞도 안보이게 비가 내려
생을 접기라도 하듯
꽃잎 떨어져
빗소리에 스며든 여자 있었네
땅바닥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물길이 흘러
흔한 풀벌레 소리 들리지 않았네
밤이고
내가 울고 있었네.
머뭇거릴 틈도 없이 별똥별이 떨어졌네.
서툴게
아주 아주 서툴게.
- 「배롱나무」 전문, 시집 『달빛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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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산이 있었네 (The Mountain Between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