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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등반' 송숙영 선생의 서평

정선여인숙 2021. 11. 8. 07:37

 

부여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신 송숙영 님의 달빛 등반서평입니다.

 

어느 암벽등반가의 달빛 등반

 

송 숙 영(한국식품마이스터고등학교 교사)

 

배추흰나비의 추억, 몽유도원도, 봄날은 간다, 별을 따는 소년들,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 카페 이름일까?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시인 신동엽길, 체 게바라길, 별길, 동양길’. 이런 이름도 있다고 하면 아~ 길이야? 길을 부르는 말들이 별스럽네? 하게 된다.

 

배추흰나비의 추억’, 이 길이 나비를 따라 나풀나풀 춤추듯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착각이다. 로프 한 줄에 매달려 손가락 끝에 피멍이 들도록 바위를 움켜잡고 매달려 한 발 한 발 디디며 생과 사를 넘나들어야 한다. 낭만적인 이름과 달리 암벽 등반가들도 어렵게 오르는 바윗길이다.

 

신동엽문학관에서 어느 암벽등반가의 신동엽길이라는 특별전시를 했다. 시인에게 바치는 헌시를 바위에 쓰는 이도 있어, 종이가 아닌 북한산 백운대 바위에 시인의 저항정신을 기린 길이 있다. ‘시인 신동엽길을 낸 이는 김기섭이다.

 

신동엽길이라 하면 굳이 시인 신동엽길로 고쳐 말하는 암벽등반가의 길과 신동엽의 산 사진에 대한 고증과 해석이 있는 전시였다. 시인의 이름을 가진 바윗길을 낸 암벽등반가의 시 몇 편도 함께 전시했다. 시인 신동엽길에 어룽지는 달빛, 별빛이 그의 시에 있었다.

 

그가 시집을 냈다. 김기섭의 시집 달빛 등반을 읽으면 산을 사랑하는 이는 시를 쓸 것 같고, 시를 아끼는 이는 언젠가 산에 오를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의 시를 읽는 동안 바위에 매달린 듯 손아귀에 힘이 주어지고, 천장을 창공으로 보기도 한다. 그가 보는 세계를 기웃거리다 바위를 하러 가겠다고 나서는 건 아닐까.

 

나는 십 대부터 절망이 절망을 부르는 벽에 매달려, 바윗길이 끝난 곳에서 또 다른 길을 찾았다. (중략) 19835, 인수봉. (중략) 죽음을 대비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835월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그는 다른 길, 또 다른 길을 계속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 중 하나가 시인 신동엽길이다. 올해 9월 시인 신동엽길을 보수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4피치 볼트 1개 추가, 10피치 크랙으로 루트 변경. 새로운 확보지점 설치 이런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바위에서 몸을 끌어올리기 어려운 어떤 구간, 누군가 멈칫 죽음을 의식할 만한 구간을 좀 편안하게 고쳤다는 말이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가슴 아픈 사고가 줄어들려나.

 

김기섭은 열여덟에 바위에 오르기 시작했고, 마흔 중반에 추락사고로 걷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올해 예순이 된 그가 처음 낸 시집이 달빛 등반이다. 존경하는 시인을 위해 길을 낸 시간이 신동엽 문학관 특별전을 거쳐 시집을 내는 데까지 이어졌다. 산을 사랑한 시인 신동엽이 시인을 사랑한 산악인 김기섭을 기어코 시인으로 만든 것인지 인연의 흐름이 경건하다.

 

김기섭의 시에는 죽음의 기미가 있다. 바위를 오를 때 내딛는 한 발 한 발에 죽음이 함께 했고, 삶의 편에 서지 못한 산악인의 이름이 자주 시에 나오기 때문일까? 죽음의 기미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는 스스로 생하고 멸하는 자연의 일부이고 존재 그 자체로 완벽하게 아름답다는 시인의 깨달음으로 시는 생기발랄하다.

 

그의 시를 읽으면 그가 올랐던 산, 바윗길 어디쯤, 동강 기슭에서 햇빛 고운 바람과 때깔 고운 이파리들과 내통하거나, 실핏줄 속으로 스며드는 적요와 맞닥뜨린다. 존재 자체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들이 기웃 내민 고개를 보게 된다.

 

반대편 봉우리가 섬으로 떠 있었을 때나, 바다 깊은 저 아래에서 숨을 참으며 융기해 오르는 수만년 세월을 떠올리게 되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의 눈빛을 만나도 당황스럽지 않다.

 

지천으로 깔린 붉은 단풍을 차마 밟지 못하는 사람, 머리는 정상이면서 팔다리 마비가 빚어낸 절묘한 문자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사람, 그가 쓴 묘비명은 고스란히 지금 김기섭이다.

 

그는 태어나

별들이 우수수 날리는 뼝대를 오르고

복사꽃 흐드러진

서강 둔치에서

물안개 피어나는 시를 썼습니다. (묘비명 전문)

 

더 이상 뼝대(강원도 지역어, 절벽)를 오를 수 없는 김기섭이 쓰는 시가 세상 속에 물안개처럼 번져가고 있다. 선운산에 바위 하러 갔다가 참당암 동백 지는 소리에 그만 머리를 깎고 말았다는 후배의 출가 사연은 억세게 바위를 오르다 이제는 보조기를 낀 손바닥으로 자판을 두드려 시를 쓰는 기섭의 출가로 읽히기도 한다. 그가 떠난 세계, 산과 암벽에 달빛이 기어오르고 있다. 달빛 등반.

 

그가 세상 속으로 물안개 피어나는 시를 흘려보내는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다. 그가 누워 바라본 세상이야기에 담길 서강 물안개는 여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는 거기서 존재 자체로 완벽한 무언가를 여전히 발견하리라. 뼝대 끝에서 봉우리를 섬으로 보는 눈으로.

 

시로 출가한 김기섭의 두 번째 시집이 벌써 궁금하다.

 

달빛 등반, 김기섭, 솔출판사, 2021, 130.